세밑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동짓달 30일 낮, 구로디지털단지 내 작은 사거리. 횡단보도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자 손수레를 끌던 60대의 남성은 주저앉았다. 인도의 차가운 경계석 위에 엉덩이를 붙인 그는 다리를 뻗더니 허리를 숙였다.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하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손수레에 얼기설기 실린 폐지와 폐박스가 초로의 주인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으나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동차들은 그와 손수레를 피해 다닌다. 누구하나 경적을 울리며 야박하게 굴지 않는다. “괜찮으냐”고 물었다. “잠시 쉬고 싶어서요.” 그의 숙연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각 신분증을 목에 건 한 무리의 여성들이 손에 든 커피 홀짝이며 종종걸음으로 초현대식 건물로 가고 있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희망을 노래한다. 꿈을 말한다. 그리고 그 희망이, 꿈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누군가의 희망은 절망으로, 꿈은 신기루로 바뀐다. 희망과 꿈을 잃은 사람들은 절망의 계곡에서, 사막의 한 복판에서 몸부림친다. 세상에 대해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원망한다. 희망이 절망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다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악순환의 질곡에서.


수레 주인은 어떤 희망을 품고 있을까. 행복주택에서 행복하게 사는 삶을 꿈꾸고 있을까, 한 묶음의 폐지라도 더 줍기를 바라고 있을까. 아니면 차가운 바닥이라도 좋으니 잠시라도 일상을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을까. 어쩌면 희망에 욕망을 더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가 바라는 한 줌의 희망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밤중에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한밤중에 까닭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두고 웃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걸어가고 있다. 까닭 없이 걸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엄숙한 시간’


고 최인호 작가는 암 투병 중 쓴 책 ‘인생’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이다. 우리들이 건강한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덕분이다. 우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과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려워하지 말기를.”


이날 한 부처 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도심에 질 좋고 저렴한 주택을 충분히 공급할 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같은 날 대통령은 3개 부처 장관 후보자를 내정했다. 모두 식견과 전문성, 강한 의지를 가진 후보자라는 설명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들 말대로라면 희망을 듬뿍 주고도 남아야 한다. 머지않아 빈자의 가슴에도 파라다이스가 펼쳐져야 한다. 다른 뉴스 채널에서는 올해 주요 뉴스를 선정해 보도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어쩌고, 트럼프가 저쩌고….


수레 주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그의 눈에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해가 바뀌는 것은 또 하나의 반복일 뿐이다. 새해에는 누군가의 아픔을 살펴보고, 부당한 상처를 보듬어주며 공감하고, 처지를 공유하자. 허세와 허울을 덮어 과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자.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 까닭 없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엄숙한 시간을 주자. 수레 주인의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지언정 잠시 쉴 수 있는 엄숙한 시간을 주자는 말이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2020년 12월 31일

전병수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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