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글이 신음하고 있다. 외래어에 치이고, 정치인에 오염되고, 신조어에 멍들고 있다. 토착화된 일본어의 기세도 여전하다. 본래의 뜻이 각색되고 왜곡된 채 사용되는 단어도 부지기수다. 젊은이들이 즐겨 쓰는 압축되고 급조된 언어들은 마치 외계인 말 같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의사소통의 기능을 넘어 사용자의 품격까지 보여준다.

 

#1
“이봐 김 씨, 공구리(콘크리트) 가다마리(굳기)가 아주 잘됐어. 10루베(㎥)가 넘는데도 말이야. 바라시한(뜯어낸) 가타와쿠(형틀)도 깨끗해. 몇 군데만 고대(흙손)로 밀면 시아게(마무리)는 끝이야.” “그러게, 이번에는 오야지(십장)한테 쿠사리(핀잔) 먹을 일 없겠네.” “김 씨, 빨리 시마이하고(마치고) 카도(모퉁이)에 있는 함바(식당)에 가서 한 잔 하세. 사시미(회) 한 사라(접시)에 히야시된(차가운, 시원한) 생맥주 한 잔씩만 마시고 가세.”

 

#2
“야구는 멘탈 게임입니다. 선수는 멘탈을 잘 컨트롤해야 해요. 잘못하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될 수도 있거든요.” “저 투수 볼은 아웃에서 인으로, 보드라인을 타고 와야 위력이 있어요. 오늘 볼은 어떻게 보입니까?” “스트라이크존에서 어렵게 걸쳐 오네요. 본인의 밸런스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좋은 볼이 나오지 않아요. 볼이 보드라인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커트를 당하거든요.”

 

#3
“나 어릴 적에 개구졌지만, 픽하면 울고 꿈도 많았지. 깔깔거리며 놀던 옥희 순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변했을까. 자야 자야 명자야, 불러샀던 아버지 술심부름에 이골 났었고, 자야 자야 명자야. 찾아샀던 어머니. 청소해라 동생 업어줘라. 어스름 저녁 북녘하늘 별 하나 눈물 너머로 반짝반짝 거리네.

 

#1은 일을 마치고 식당에 가서 맥주 한 잔 마시자는 건설 노동자들의 대화다. 일본어투성이다. 우리말보다는 일본말이 더 많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물 흐르듯 막힘이 없다. 나이 지긋한 현장 노동자들이야 금세 알아듣겠지만 건설업에 갓 입문한 젊은이들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건설현장에 뿌리내린 일본어의 생명이 얼마나 질긴 지를 보여준다.

 

#2는 지난 추석 연휴 때 한 스포츠 채널의 야구 경기 중계방송의 한 장면이다. 영어와 우리말이 범벅이 됐다.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 경기 규칙을 아는 사람이야 어렵지 않게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야구 문외한들에게는 짜증과 혼란만 줄 뿐이다. 외국어를 오남용하는 전문가들이 우리말을 죽이고 있다. 
 

#3은 가수 나훈아 씨가 추석 연휴 공중파 방송 쇼 무대에서 불렀던 ‘명자야’라는 대중가요의 1절 가사다. 한문 투나 영어 단어가 없다. 귀에 익숙한 생활단어들로 가득 채웠다. 우리말을 제대로 살리면서 대중에게는 노래의 의미를 매끄럽게 전달했다. 정체성을 잃은 #1, #2와는 확연히 비교된다.

 

변화하지 않는 언어는 죽은 언어다. 언어는 다른 문화집단과 교류할 때 변화의 폭이 크다. 불가피하게 외래어를 차용해야 될 때도 있다. 그러나 건설현장에서는 일본어를 써야 대접을 받고, 스포츠나 쇼 프로그램에서는 영어를 많이 써야 우월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환경의 시기가 있었다고는 하나 오늘도 통용되는 건설현장의 일본어 잔재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광복된 지 75년이 지났다.

 

글로벌시대가 됐다고는 하지만 맹목적으로 영어 단어를 혼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말과 글을 욕보이는 언어 사대주의에 불과하다. ‘핵인싸(핵+인사이더)’와 같은 신조어 사용도 문제다. 우리말 구사능력을 떨어뜨리고 정체성을 모호하게 한다,

 

하나하나 정리해야 한다. 일제 잔재 용어를 비롯해 어려운 한자말, 필요 이상의 외래어와 외국어는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 계층 간 또는 직종 간 갈등을 초래하는 용어와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용어, 불쾌감을 주는 용어도 부드러운 말로 바꿔야 한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각 부문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오염된 언어들을 걷어내 우리 언어의 정체성과 품격을 높여야 한다.

 

2020년 10월 7일
전병수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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