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공식 출범 100여 일 만에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AIIB는 지난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시아개발은행(ADB)과 파키스탄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에 공동 출자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투자 규모는 3억 달러로, AIIB는 이를 포함해 올해에만 총 15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AIIB는 또 내달 25∼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첫 연차총회를 개최한다. 이번 총회에서는 파키스탄 고속도로 등 4개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결정하게 된다. 아울러 신규 회원국들의 가입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AIIB 창립회원국은 현재 57개이지만 가입 의사를 밝힌 나라가 3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AIIB는 향후 2~3년 이내에 회원국 수가 100개국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AIIB시대 개막의 의미

지난 1월 16일 공식 출범한 AIIB는 미국과 유럽이 각각 주도하는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 그리고 일본 주도의 ADB 등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됐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러시아 인도 독일 영국 등 57개 나라가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지분율 30.34%, 투표권 26.06%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사실상 주도하는 구조다. 중국은 ADB에서 지분을 늘리는 방식으로 국제금융시장에서의 발언권을 확대하려 했으나 일본, 미국 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따라 중국 주도의 새로운 금융기구 설립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제전문가들은 중국이 AIIB 출범을 계기로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구사하는 미국의 견제를 돌파해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동시에 세계 경제질서 재편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AIIB는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건설 사업자에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투자 대상은 건설·토목, 통신·IT, 전력, 상·하수도 등 광범위하다. 아시아 지역의 인프라시설 투자수요는 2020년까지 매년 7300억 달러(881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ADB의 연간 투자규모는 200억 달러 수준에 불과해 그만큼 AIIB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기대 받고 있다. 특히 AIIB는 인도나 동남아시아 등을 주로 지원해왔던 ADB와 달리 아시아 전역을 투자 대상으로 삼고 있어 경제 파급효과가 더 클 것으로 전망된다.


AIIB 출범과 더불어 민간기업의 투자기회 또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인프라 프로젝트는 해당국 정부 또는 은행에서 비용을 조달했다. 민간기업의 경우 인프라 프로젝트 참여가 허용되더라도 복잡한 법적 절차와 규제, 노동의 질, 간헐적인 정치적 방해 등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철저히 배제돼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들의 재정수지 적자, 인프라 투자 예산 부족으로 민간투자 유치를 통한 민관협력사업(PPP) 방식의 인프라 투자가 요구되고 있다.

 

◇ 경쟁과 협력, 중국은 ‘양날의 검’

우리나라는 AIIB 지분 중 3.81%를 확보하고 있다. 지분율은 중국 인도 러시아 독일에 이어 다섯 번째이지만 사실상 중국 다음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AIIB 개소식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시진핑 중국 수석에 이어 두 번째로 축사를 해 우리나라의 AIIB 내 높은 영향력을 보여줬다. 지난 2월 5일에는 홍기택 산업은행 회장이 AIIB 5명의 부총재 중 한 명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낮은 지분율에도 불구하고 AIIB 이사국 지위를 확보함에 따라 인프라 투자대상 결정 등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는 점 또한 긍정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지난해 저유가 등으로 해외건설 시장에서 뒷걸음질 쳤던 우리 건설업계로서는 AIIB 출범이 기회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예상이 가능하다. 글로벌 인프라 투자에서 아시아의 비중은 2018년 40%, 2025년 48%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우리 건설업계의 기술력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기업의 아시아 지역 인프라 프로젝트 수주 가능성은 증대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이 AIIB에 불참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문제는 AIIB의 투자방식이다. AIIB는 은행이 여러 국가들로부터 필요 자금을 차입한 후 투자 역시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다자개발은행(MDB) 방식으로 투자하게 된다. MDB 방식은 일반적으로 수익성이 낮고 공사기간이 길어 우리 건설업계의 참여율이 저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WB, ADB 등 MDB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업에 대한 우리나라 기업의 참여율은 약 1% 수준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아울러 MDB 방식은 규모가 크더라도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이 중국이나 인도 기업들과의 가격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MDB 방식의 특성상 우리 기업과 중국 기업의 컨소시엄 구성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MDB 방식을 통한 프로젝트는 우리 기업의 과거 실적이 부족해 진입장벽이 높은 만큼 경험과 정보에서 우위를 지닌 중국 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수주에 성공해 실적을 축적하게 되면 이후에는 지속적인 사업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 정부, 유라시아 프로젝트 마침표 찍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3년 10월 ‘유라시아 시대의 국제협력 컨퍼런스’ 기조연설에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전략을 제안한 바 있다. 아시아 인프라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기업 투자, 정책 지원도 중요하지만 외교적 역할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최근 북한과의 관계 악화로 유라시아 프로젝트의 궁극적 취지가 퇴색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AIIB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정부는 AIIB 사업 준비단계(사업발굴 및 타당성 조사)에 사용할 신탁기금을 설치함으로써 우리 기업의 사업 참여를 유도하겠다는 복안이다. 이미 올해 예산 100억원을 신탁기금으로 쓰겠다는 계획도 잡았다. 아울러 중장기적으로 신탁기금을 확대해 AIIB 회원국과 지식교류, 정책연구, 장학기금 등을 지원하는 ‘코리아 프로그램’으로 정착시키겠다는 계획이다.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활용해 AIIB 수혜국 관심분야 위주로 공동사업 발굴에도 나선다. 우리나라 EDCF는 지난 1987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기준 총 352개 사업에 5조8000억원이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에 지원되고 있다.


결국 AIIB를 얼마나 잘 활용해 우리 기업들이 대륙에 진출할 때 혜택을 입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정부는 나진-핫산 자유무역항 프로젝트 무기한 보류 등 북한발 변수가 존재하지만 AIIB 출범을 전환점으로 해외건설 분야가 활기를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AIIB, 위기는 곧 기회

전문가들은 AIIB 출범이 새로운 기회이자 위기라고 역설하고 있다. 정부의 유라시아 프로젝트와 맞물려 AIIB가 해외건설 수주 확대의 지렛대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AIIB를 주도하고 있는 중국의 아시아 인프라 시장 선점을 지켜보는 데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ADB 출범 초기 일본 건설사들이 해외건설 시장 확대를 위해 ADB 자금을 활용했다는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 상반기 내에 정책금융기관, 민간은행, 국내 기관투자가 등이 참여하는 해외 인프라사업 공동투자 협의체를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아시아 인프라시장에 개별적으로 투자해왔던 수출입은행, KDB산업은행, 무역보험공사, 한국투자공사, 글로벌투자은행(IB), 자산운용사 등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국토교통부는 AIIB가 투자하는 사업에 국내 기업이 진출할 때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정부가 조성한 코리아해외인프라펀드(KOIF)와 글로벌인프라펀드(GIF)가 AIIB 사업에 공동 투자해 한국 건설업체가 수주 기회를 잡도록 지원한다는 복안이다. 또 앞으로 민간이 설립할 수 있는 해외건설특화펀드도 AIIB가 투자하는 사업에 투자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기획재정부는 AIIB팀을 신설해 정책 역량을 강화했다. AIIB팀은 부총재와 이사 업무를 지원하는 한편 우리 기업이 AIIB를 활용해 아시아 인프라 시장에 활발하게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건설업계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국내 건설사들은 해외건설 시장의 상생발전을 위해 ‘해외건설 수주플랫폼’을 구축했다. 해외건설 수주플랫폼에는 현대건설 삼성물산 대우건설 GS건설 대림산업 SK건설 등 국내 15개 대형 건설사들을 비롯해 국토부 산하 해외건설협회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플랜트산업협회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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